ONE AND THE SAME

잃어버린 관계를 찾아서

 

이 은종의 사진들은 인물사진들이다. 인물사진은 ‘한 사람’을 파인더로 포착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캐릭터를 프레임 안에 담는다. 하지만 이 은종의 인물사진들은 다르다. 그의 사진들은 더블 캐릭터를 지닌다. 우선 사진 속 인물들이 그렇다. 프레임 안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니지만 모두 똑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면서 같은 사람들, 즉 동명이인들이다. 인물들이 그렇듯 이 은종의 사진들 자체도 더블 캐릭터를 지닌다. 이 은종의 사진들이 찍어서 보여주는 건 얼굴들만이 아니다. 그건 이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은종의 사진들은 얼굴을 찍으면서 동시에 이름을 찍는다.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내 이름을 지닌 다른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라고 이 은종은 작업 노트에서 말한다. 하지만 하나의 긴 작업이 궁금증과 호기심만으로 끝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진들 속으로 스며 든 어떤 의도, 이름 지어 ‘무의도적 의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은종의 동명이인 사진들 속에는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 무의도적 의도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 은종의 동명이인 사진들을 이해하는 일은 아마도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일 것이다.

 

이 은종의 사진들은 A. 잔더의 사진들을 연상 시키고 서로 비교하게 만든다. 누구나 알듯이 잔더는 얼굴의 사회적 운명을 사진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사람의 얼굴이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가 그 시대 속에서 담당하는 기능을 통해서, 더 정확히 그 시대가 그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직업을 통해서, 이차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사진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한 ‘시대의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 잔더는 두 가지 중요한 사진적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는 사진 속 인물들의 직업을 보여주기 위한 소도구들의 사용이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건 그 인물들이 스스로 취해 보이는 포즈의 포착이다. 포즈는 잔더에게 한 사람의 시대적 운명을 표층적으로만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자발적 표현 매체였다. 이 은종의 인물 사진들 속에서도 잔더식의 표현 전략은 발견된다. 그 또한 정면 촬영법을 사용하고 개개 인물들의 직업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동 현장과 그곳의 소도구들을 배경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인물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직립하고 선 그의 사진들 속에서 일체의 포즈들은 생략 되어 있다. 이 의도적인 포즈의 생략이 이 은종을 잔더와 동일시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은종의 인물사진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건 그 인물들의 사회적 성격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 어떤 것은 무엇일까?

 

동명이인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얼굴과 이름을 동시에 파인더로 포착하면서, 이 은종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 - 그것은 내게 인물과 인물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모종의 ‘관계’처럼 여겨진다. 그 모종의 관계를 나는 W. 벤야민을 따라서 ‘비지각적 유사성 (Unsensual Similar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지만 서로 상이한 존재들 사이를 이어주는 어떤 닮음의 관계성이 벤야민이 말하는 비지각적 유사성이라면 그러한 닮음의 투명한 관계성은 이 은종의 사진들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된다. 우선 ‘이름과 얼굴 사이의 닮음’이 있다. 성명학적으로 볼 때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얼굴과 다른 것이 아니다. 얼굴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고 이름은 문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점성술과 성명학이 다른 것이 아니듯 얼굴과 이름은 그 사람만의 존재적 고유성 안에서 합쳐진다. 이 은종의 사진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얼굴과 이름으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진과 이름 사이의 닮음’이 있다. 사진과 이름의 목적은 동일하다. 이름이 어느 한 사람이 타고나서 앞으로 간직하게 될 고유한 본질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사진 또한 대상을 이미지로 바꾸면서 그 대상의 본질 자체를 이미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 일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만의 고유한 본질과 만난다는 걸 의미한다. 끝으로, 이것이 내게는 이 은종이 자신과 동일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을 사진 모티브로 삼게 된 정작의 이유인 것 같은데, ‘나와 타자 사이의 닮음’이 있다. 나와 너는 서로 타자들이다. 이름이 같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쌍둥이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사랑해도 너와 내가 서로를 바꿀 수는 없다, 라고 E. 레비나스가 말했듯, 이 상호간의 타자성은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와 나 사이에 비지각적 유사성, 어떤 닮음의 관계성, 타자성의 거리를 지우며 면면히 흐르는 모종의 정서적 교류를 알고 있다. 정과 사랑, 우정과 존경 - 그 명칭은 다양해도 분명한 건 우리가 이 모종의 관계성을 떠날 수 없으며 그 관계성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일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 은종은 동명이인들을 찾아다닌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모습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 어쩌면 뜻 없어 보이는 이 작업은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을 응시하는 이 은종의 아픈 시선에서 비롯하는 일인지 모른다. 나날이 단자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점점 낯설어지는 사람들 사이,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너와 나 사이의 그 소외와 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명이인의 아리아드네 끈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닮음의 관계를 확인하고 기록하려는 이 은종의 작업이 그 멈을 가까움으로 낯설음을 닮음으로 바꾸고자 하는 안타까운 노력처럼 여겨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하자. 나의 강박적 감정들 중에는 ‘혼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특별한 느낌도 있다. 그가 누구이든 그냥 묵묵히 혼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나는 어쩐지 슬퍼진다. 그것이 그저 잠깐 머물고 지나가는 센티멘털리즘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옛날,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그건 몸 하나를 얻어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김 진영 (예술비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전문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무의미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의 대상들로부터 어떤 대상만이 지닌 고유하고 특별한 무엇을 가려내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명명하는 행위는 그 대상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인 동시에 그것의 참된 가치와 본질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싯구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 의미있는 무엇이 되고 싶다. 나의 나됨을 찾아주고 나에게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당신, 당신에게 가서 당신의 꽃이 되고 싶다.

 

다중매체의 시대에 익명의 한 점으로 살아가는 무수한 존재들의 고유한 실체에 대한 확인, 그 증명의 시도로서 나의 작업은 출발한다. 사진은 대상의 정체를 사실로 인식시키기 위한 증거의 한 방편으로 가장 적합한 매체이며, 그 어떤 그림이나 글보다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포획하고 표현하며 전달해주는 매체이다. 한 알의 사과를 사과로 나타내고자 할 경우 사진만큼 정확하고 완벽하게 실물을 묘사해낼 수 있는 매체는 없듯이, 여기에는 언어보다도 강력한 지시적 기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름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장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지시해준다는 점에서 사진과 닮아 있다. 만약 이름 그 자체를 사진에 담을 수 있다면, 지시된 의미는 어떤 중개의 도움 없이도 곧장 전달 가능한 형태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엄밀히 말해 이름은 대상에 붙여진 언어기호일 뿐 실체가 없으며, 피사체를 매개해주고 지시해주는 기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름들” 은 사진에 담길 수 가 있다. 어떻게?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 즉 동명이인들에 그 해답이 있다.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초상 사진을 수평 배치할 때, 각각의 이미지들을 연대해주는 고리인 동시에 그 전체를 하나의 의미망으로 조직하는 단위는 그들의 “동일한 이름”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련의 이미지들은 이 “동일한 이름” 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지점으로 수렴되며 등가의 관계를 이루게 된다. 요컨대 사진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개별적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이를 관통하며 거기에 담기는 것은 바로 하나의 기표, 그들의 이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내고 기록하며 그를 통해 어떤 대화가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한 수단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낯익은 우리네 초상들에 늘 불리고 부르면서 자동화된 이름이 다시금 호명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낯선 눈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은종 

 

 

 

You were a mere sign, 

Till I named you.

 

But when I called you by name 

You came to me:

You became a flower.

 

I want someone, 

My match in tone and scent,

Would call my name as I called yours. 

 

I will go to that person,

I will be that person’s flower.

 

We all wish to be something.

You for me, me for you;

To be something meaningful, unforgettable. 

 

Flower by Kim Chun-soo 

 

The act of naming can be referred to as lending meaning to the meaningless. So an act of sorting out something special from unspecified things, then naming it, is a discovery of its meaning, true nature, and value. Like Kim Chun-soo’s poem above, we all wish to become something both unforgettable and meaningful to each other. Call me by my proper name: I will go to you, become your flower.

 

My work begins by identifying countless beings that often remain anonymous in our age of multimedia. I am interested in photography, that most appropriate of mediums, for making an object perceived appear real, and to capture, represent, and convey an object more directly and concretely than painting and writing. There really are no other mediums able to capture an apple more completely and accurately than photography: it holds a referential function stronger than language. 

 

A name is akin to a photograph in that it refers to a specific object concretely and directly. If a name can be depicted in a photograph, a referential meaning can also be presented as a form for direct conveyance – that is, without intermediation. However, this is unlikely, as a name is just a linguistic sign; it has no substance, and is just a symbol indicating an object. Paradoxically however, we can encapsulate such names. How can we do this? This answer is within different people with the same name. 

 

This ‘same name’ connects each image of a person who shares that name, organized in a semantic network, of portraits arranged horizontally. These remain equivalent, under the same name, and as a series of images they converge into the common past of that same name. In other words, each photograph can show an independent image of each person sharing the same name, so what’s contained in the image is their name as signifier. The photograph thus becomes a means for communication like language, in that it encapsulates and chronicles ideas and feelings, and enables us to talk with each other. When our name is called, we realize that our mere existence becomes unforgettable experience.

#01 이은종, D.O.B JUNE 16, 2002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2 이은종, D.O.B OCTOBER 12,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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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이은종, D.O.B NOVEMBER 12, 1986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4 이은종, D.O.B JUNE 23, 1984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5 이은종, D.O.B NOVEMBER 19 1980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6 이은종, D.O.B JANUARY 10, 1973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7 이은종, D.O.B JULY 28, 1972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8 이은종, D.O.B FEBRUARY 20, 1971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09 이은종, D.O.B JANUARY 20, 1970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0 이은종, D.O.B MAY 15, 1968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1 이은종, D.O.B NOVEMBER 2, 1965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2 이은종, D.O.B AUGUST 26, 1965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3 이은종, D.O.B AUGUST 11, 1962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4 이은종, D.O.B MARCH 7, 1957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5 이은종, D.O.B AUGUST 17, 1955

Gelatin silver print_60x60cm

#16 이은종, D.O.B OCTOBER 1, 1935

Gelatin silver print_60x60cm